작성자 _ 전남무안
(http://cafe.naver.com/agitproject/417)
뻔뻔스럽게도 ‘공간초록’에 대한 사설이 길어질 것 같다. 이건 ‘공간초록’을 빨리 찾지 못하고 늦어서 영화의 앞부분을 보지 못해 리뷰를 잘라 먹을 것을 변명하기 위한 구차한 분량이기도 하다. 나는 작년부터 공간초록에 대해 여러 번 들었다. 부산에 대안공간 중 하나며 그곳에 간여하는 지인들도 몇 있다. 그들이 갔다 온 얘기를 들으며 ‘오호- 괜찮네, 함 가볼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어코 내가 그곳에 도달한 때는 3월 31일 초록영화제가 열리는 날 시작시간 13분이 지나서였다. 나는 자칭 내비게이션으로 안 가본 곳 없고 교대 부근도 초행길은 아니었다. 길눈이 밝은 편이라 다른 사람들처럼 헤매지 않을 것 같고 게다가 든든한 다음 로드맵 어플도 내 손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시작시간 30분이 되어서도 건물은 ‘나오지’ 않았고 위성업데이트 지도도 알량한 나의 촉도 무력해졌다. 결국 전화를 통해 어리눅은 지시와 발걸음으로 더듬어 갔고 작은 불빛과 영화 상영 소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시작한 가운데 불청객처럼 맴 바깥에 신발을 벗고 방 모퉁이로 올라앉았다. 뻘쭘함과 민망함은 나를 습격했고 나는 짜증과 불만인척 방어했다. ‘아씨 간판도 눈에 안 띄고 지도는 왜 그 모양이고. 길치는 혼자 오지도 못 하겠네’
소위 부산의 대안공간이라는 곳을 나는 대여섯군데 정도 가보았다. 대체로 그렇게 비슷하다. 그곳들은 누구나 알법한 지하철역이나 큰 건물-이 아닌 그 뒤, 사이에 겸손하게 알알이 박혀 있다. 반면에 눈감지 않는 이상 볼 수밖에 없는 빛 공해를 내뿜는 천박한 간판들과 아주 호의적이고 쾌적해 보이는 실내 인테리어로 가득 찬 내부로 우리를 유혹하는 줄도 모르게 유혹하는 가게들은 너무 너무 눈데 잘 띄고 들어가고 싶게 생기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우리의 ‘발길을 선점’하고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뒤’에 위치한 대안공간들의 그‘접근성’이라는 것은 대체로 좀 떨어진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 접근성을 만들어 내기까지 각고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며 시선받기 좋아하는 가게들이 허용한 최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리는 말로만 듣다가 이렇게 벼르다 오고 헤매며 걷다가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게도 하고 지도보다는 지인에게 묻는 수고를 통해야만, 심지어 지각해서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의 하나가 공간초록이고 사대강 관련 환경다큐영화 ‘강, 원래’이다.
우리는 숫자로 체감하고 확률로 환산하는 것에 익숙하다. ‘익숙하다’는 것은 ‘민감하다’나 ‘인상깊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깊은 인상을 주기위해 어마어마한 숫자를 제시하기도 하지만 외려 그 수에 짓눌려 감각이 사라지기도 한다. 방사선 기준치 800배 검출이라거나 OECD국가 중 청소년 자살률 1위라거나 사대강 공사로 인해 사라진 ‘수많은’ 생명들 따위가 그러하다. (이제서야 슬슬 영화 얘기) 강에 의존하는 생태계를 촘촘히 헤아리자면 어류 갑각류 수초 파충류, 철새나 텃새 기타 포유류 등이 있을 것이다. 강이 없어진다면 일단 이것들도 아마 사라지겠지. 난 솔직히 사대강개발을 반대하는 첫 번째 이유이자 얄팍하게도 거의 모든 이유는 이거다. 그러한 이유로 공사 반대 시위를 하는 영화가 ‘강 길’이다. 강 흔적만 남은 모래더미를 파보니 일생을 거기서 살았을 물고기들이 모래와 자갈로 염장한 듯 삽도 안 들어 가게 묻혀 있었다. 말 그대로 물고기를 생매장한 그 곳엔 많은 새들이 날아와 ‘주워’ 먹으며 손쉽게 배를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웬 떡’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고, 사라지고 난 뒤에는 예전보다 훨씬 힘들게 사냥해야 하거나, 혹은 아예 사냥이 불가능해질 것이므로 나는 그새들이 야속하거나 잔인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슬픔을 더 깊게 만드는 존재로 보였다. 약자에게 주는 세상의 거의 모든 ‘웬 떡’. 그 떡을 배고픔 때문에 먹을 수밖에 없는 약자들- 수몰될 토지를 국가로부터 보상받아 마을을 떠나는 농민들(농민) 국가 지급액의 반밖에 받지 못하지만 비수기를 이겨내려고 지나친 적재와 지나친 속도로 달리는 지나친 노동을 하는 화물차 운전수들(저문 강에 삽을 씻고) 공사가 지연되면 임금이 지연되는 건설노동자들(비엔호아)이 그러하다. 지금은 아마 흔적도 없을, 영상을 찍을 당시엔 일부나마 남았던 간 한곳에서 수달과 수리부엉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제작진들은 멸종위기의 천연기념물이기에 희박한 가능성이나마 품고 이리저리 연락을 해보았지만 시위자의 다리가 포크레인에 깔리는 얼마간의 시간만이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라고 말했다. 잔디밭을 밀어버리면 그 밑의 개미제국이 사라지듯, 웅덩이를 메우면 장구애비가 몰살당하듯 강에 딸린 수많은 생명들은 그저 안타깝지만 당연히 감수해야할 대상인가?
“농민? 우스운거야...”(땅) ‘농민’이라는 단어 대신 바꿔 쓸 수 있는 단어는 앞서 강과 살던 수많은 생명들, 새, 화물차 운전수, 건설노동자, 시위자, 천연기념물 정도가 아니겠는가. 천연기념물은 국가나 지방고공단체가 법률에 따라 지정하여 보존 관리하는, 학술상 가치가 있는 천연물이다. 도시화가 구석구석에서 증식하고 있는데 ‘농민’은 위의 기준에 부합과는 부분이 많다. 농민 살리기 운동도 많이 하고 농촌 장가보내기나 농촌 인구이탈 방지 대책도 다양하다. 하지만 그 전에 자생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을 무시한 채 정부는 정책과 수행으로만 인지하는 그들의 장소를 청계천처럼 깔끔하게 싹 밀어버리고 예쁘게 단장하고. 더 좋은 물을 쏟아 불러놓았든 풀어 놓았든 청계천에 1급수에 사는 멸종위기 물고기가 한번이라도 보이면 성과급을 받아가는 게 전부다. 평생을 농사짓던 농민들을 도시화된 어딘가로 모셔 놓고 정착시켰다고 성공률에 숫자를 보탤지도 모른다. 주인공 농민은 한평생 살았고 아버지가 길들인 옥토를 수몰시킬 수 없다며 수자원공사의 보상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 거절한 사람은 이 단 한사람이다. 이것은 그들의 셈에서 명백한 압도적인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신념조차 확률로 넘어가면 한없이 초라하다. 이미 국유지가 된 땅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뭐라도 해야겠기에’ 보리 파종을 하지만 며칠 집을 비운사이 모래로 싸그리 덮어버린다.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에서 농민이란 수출탑을 세운 노동자들보다 더 빨리 잊혀진 존재다. 그러면서 무슨 날만 되면 추켜세워줬다가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욕을 했다가 결국 이렇게 푸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그렇게 내뱉었던 말이다. (내가 우스워지는 때는 언제일까.) 낙동강가의 모래땅을 비싸게 보상받고 춤춘다는 엄마 친구는 포함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례하게도 내가 멸종위기의 천연기념물 취급하고 있는 이들이 애처롭다.
애처로운 마음은 돌이킬 수 없기에 이내 곧 과거형이 되기 십상이다.(비엔호아) ‘추억’이라 붙이면 그럴싸하겠다. 현재에는 없는 곳,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곳, 쉴 수 있는 곳, 아련하고 애잔한 곳, 변화BYENHWA가 일어나기 전의 곳. 강에서 즐겁게 놀던 일은 과거다. 같이 놀던 친구는 강이 아닌 ‘도시’에서 ‘일’을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의 나이가 몇이든 세월을 보내면 후회되는 일이 생기고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는 건 알 것이다. 영화 속 친구는 되도록 과거를 후회를 안 하려는 다짐다짐 열매를 먹는다고 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일단 그것은 ‘변화’니까. 하지만 그것은 추억에 찌질거림을 이기는 쿨 함이 아니라 찌질거리고픈 욕망조차 억누르는 슬픈 대답 같았다. 감독은 추억은 소중한 것이며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추억이 변화하면 슬퍼한다고 했다. 강 역시 누군가의 추억의 장소일진대 그것이 지금 사라지고 있으며 그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슬퍼하는 것이 나름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슬퍼하는 일. 전반적으로 이 옴니버스 영화에는 슬픈 감상이 흐른다. 눈물이 군데군데 흐르고. 어쩌면 ‘이미’라는 말 때문에 더 울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화가 끝난 후 안 된 일이지만 저런 시위나 시도들은 (보았듯!)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시위자와 현장 노동자들의 입장이 서로 상충할 때 서로는 서로를 미워하게 되지만 정작 모두의 미움의 대상은 다른 곳에 있고 그곳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어떤 선택도 최선이 아니며 혹은 어떤 선택을 하지 못할 이유는 너무 많고 확실하기에 방법이 없어 또 슬프다고 했다. 그에 대한 답을 나는 큰소리로 답해주고 싶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무능의 급진성이오!!! 농민이 한철을 못 넘길 보리를 파종했듯, 노동자는 공사장에 가지 않아 자식 학비를 포기하게 되는, 보상을 거부하고 끝까지 땅을 지키는, 모두가 아무 것도 하지 말게 되는!!!’라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흥분을 꼭 다물어야 했다. 이것은 단지 내 머리속 급진의 무능성일 따름이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여기서 자리만 뭉개고 있는데 누구를 무능의 급진성으로 떠민단 말인가. 나는 고작 이 우울한 마음을 다른 동무들에게도 전하고자 영상물이나 빌리려 마음먹고 있다. 게으름과 싸워가며 내 발로 어렵사리 찾아간 사대강의 현장을 (그것도 이미 과거형이지만) 같이 보면서 얘기한다면 히틀러처럼 후세인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만든 범죄자를 법정에 세우고픈 나의 급진적 무능함에 지모가 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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