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장소] 광안리 해변가 뒷골목(?) 오래된 빌딩에 위치한 미디토리 사무실. 몇 년 사이에 광안리에 힙한 가게들이 많아졌습니다. 점심시간에 나가면 새로 생긴 가게 앞에 캐리어를 끌고 온 관광객들이 웨이팅을 하며 줄을 서있죠. 그 앞을 기웃거리다가도 우린 다시 오래되고 익숙한 가게로 발걸음을 돌리곤 합니다. 단순히 물리적인 개념이 '공간'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삶이 더해지면 '장소'가 된다고 합니다. 올해는 이 코너에서 미디토리의 경험과 호기심이 담긴 장소들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스리슬쩍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풍경과 사람들의 이야기도 더해볼게요.
에디터. 고탱
지난 6월, 미디토리언 서수원님의 생일을 맞이하여 삼행시 짓기를 한 적이 있다.
서_서른살
수_수영토박이
원_원더풀
내가 지은 슴슴한 삼행시가 미디토리 공식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공개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것이 모티브가 되어 망미1동 시간여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도 아티스트웨이의 영향인가? 🤨 미디토리의 아티스트웨이 워크숍 리뷰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타이틀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평화로우면서도 적당한 운동량을 뽑아낼 수 있는 기분 좋은 산책코스였다.)
우리는 서수원 님 생일을 계기로 탄생 만 30주년을 맞아 그가 유년시기를 보낸 망미동 일대를 탐험해 보기로 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미디토리가 서면에서 광안리로 온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수영구에서 가본 곳이라고는 광안리 해변과 광안동, 망미2동 핫플 정도에 그친다. 이번 기회에 수영구 원주민만 아는 길을 수원님의 가이드로 탐험해 보기로 했다.
수영구는 이사 나가는 주민보다 계속 사는 주민이 훨씬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영구가 그만큼 살기 좋은 주거 환경인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이번 망미1동 동네 탐방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내심 있었다.
수원 님은 수영구에서 태어나 유치원(유아교육을 겸하는 미술학원), 수미초, 광안중을 다녔다. 고등학교는 건넛마을인 대연동으로 통학해서 다녔다고 하니, 어린 시절 대부분은 망미1동에서 나고 자란 셈이다.
어떤 민속학자는 한 지역에 3대 이상 살고 있어야 토박이 또는 본토박이라고 한다는데, 부모님, 조부모님까지 수영구 주민이셨다면 혹시 왕 토박이?
“저는 망미동에서 자란 기억만 있었는데 부모님 말씀으로는 다른 지역에 잠깐 살다가 이사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수영구는 아니지만 부산에서는 3대째 살고 있으니 부산 토박이는 맞는 거 같아요.”
드디어 탐험 당일, 우리는 망미동 지하철역으로 출근했다. 출근/등교 시간대가 아니라서 그런지 들어서는 골목마다 차분하고 평화로웠다. 가끔 지저귀는 참새 소리 덕분에 여유로운 아침 산책 모드 On!
동네가 주택가라서 밤 되면 엄청 조용하고 어두웠어요. 다른 동네 학생들이 와서 돈을 달라고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로 위협은 했어도 때리거나 한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도 겁은 났었는지 항상 집에 갈 때 형을 불러서 같이 들어갔었어요.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수원 님의 초등학교, 중학교 등굣길이었다.
수원 님은 어릴 때 등교하는 오르막길이 굉장히 가팔라서 다리가 아팠다고 했다. 부산의 학교들은 웬만하면 다 언덕에 자리해있으니, 경사가 좀 심했나보내 생각하며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걸어갔다.
초등학교 앞을 떠올릴 때 반드시 등장하는 곳이 문방구와 분식집 아닐까?
그때 사장님이 아직도 그대로 계시네요. 그때도 이미 백발이었는데…벌써 그게 20년 전이에요. 초등학교 수업 준비물을 학생들보다 더 잘 알고 계셨던 거 같아요. 느릿느릿한 손짓이랑 나긋나긋한 말투가 기억나요. 그때도 이미 오래된 문방구였던 것 같은데, 아직 장사하시는게 신기해요. 주위에 오래된 서점, 분식집 대부분 간판이 바뀌거나 다른 가게가 들어왔었는데, 문방구는 그때 그대로 있네요.
백발의 문방구 사장님은 문방구 창가 한쪽에 앉아 나지막한 햇살을 받으며 신문을 읽고 계셨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옛날 뽑기 기계와 요즘 장난감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문방구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문방구 옆에는 동네서점이 자리하고 있다. 서점에 붙은 광고물을 보니, 국민학교 때 샀던 참고서와 문제집이 생각났다. 국민학생일 때 주로 이용했던 문제집 이름 중에 생각나는 게 표준전과, 동아전과, 표준완전학습, 다달학습, 이달학습, 맨투맨 기초영어 등이 있다.(왜 생각나는 거야? ㅜㅜ너무 하기 싫었나 보다)
“수원 님도 이 서점을 주로 이용했나요?”
“네, 주로 동네학원에서 가르치는 문제집을 사러 많이 갔었어요. 학교 앞 서점이라 그런지 책을 사면 꼭 과자나 초콜릿을 같이 줬던 거 같아요”
그 시절 분식집 자리에는 돈가스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저 자리에 카페를 차리고 싶어서 20대 때 아는 형님과 함께 부동산에 가격도 알아보고 나름 사업전략 PPT까지 준비했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냥 잘될 거로 생각하고 들떠있었던 거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지금은 다른 카페도 많이 생기고 안 하길 잘한 거 같아요.”
수원 님의 등굣길에는 수미초등학교, 덕문여고, 광안중학교, 부산배화학교 학생들이 함께 다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부산배화학교는 역사가 꽤 오래된 학교라고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1953년에 개교하고, 80년에 망미동으로 신축이전했으며, 청각장애 교육의 요람으로 지적 장애교육도 함께 하는 공립특수학교이다. 수원 님의 배화학교에 대한 기억을 들어보자.
배화학교를 항상 지나쳐서 학교에 다녔어요. 하지만 그 친구들과 이 길을 함께 걷진 않았어요. 늘 학교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을 봤던 것 같아요. 가끔 배화학교 교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며 등교했던 게 생각나요. 방금도 올라오면서 들었어요. 혹시 들으셨나요? (웃음) 또 기억나는 장면은 한 번씩 배화학교 학생들이 우리 반으로 와서 함께 수업했던 게 기억나요. 자세한 수업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준비물로 과자를 한 봉지씩 사 오라고 하셨었어요. 그걸 나눠 먹고 놀았던 거 같아요.
수미초등학교 정문 바로 앞에는 서운암이라는 절이 있다.
서운암 입구에 적혀있는 <일상의 다섯 가지 마음> 글귀는 평범한데 뭔가 묘한 감동이 있다. 이곳을 지나는 학생들이 매일 저 글귀를 보면서 지나간다면 마음수련이 절로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수원님은 저 글귀를 초6 년, 중3 년까지 총 9년을 읽어서 지금과 같은 좋은 품성을 지니게 되었나 싶기도 하고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
'고맙습니다.' 라고 하는 감사의 마음
'미안합니다.' 라고 하는 반성의 마음
'네, 그렇습니다.' 라고 하는 유순한 마음
'덕분입니다.' 라고 하는 겸허의 마음
'제가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봉사의 마음
수원 님이 수미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이렇게 멋들어진 정문은 아니었다고 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커다란 나무 그늘아래 체육수업을 열심히 하고 있는 수원 님의 후배들이 보인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니 개교일과 함께 비석에 새겨져 있는 문장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보통은 충효가 새겨져 있을 법한 포스인데, 이 얼마나 푸르른 문장인가? 심지어 내 나이와 2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둥 열심히 비석을 감상하던 찰나, 경비실 아저씨께서 정문 근처를 기웃거리는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학교 안은 외부인 출입이 안 되는데, 무슨 일이죠?”
“네, 이 학교 졸업생인데요. 오랜만에 학교에 놀러 와 봤어요. 여기서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경비아저씨는 살짝 미소를 보여주시고, 이내 나무 가지치기를 하러 화단에 들어가셨다. 우리의 시선도 아저씨의 동선을 따라 화단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잊었던 또 하나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 저건 학교마다 꼭 있었던 광물들! 어릴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광물이 다 커서는 왜이리 신기해 보이는지...
가끔 친구들이 방과후에 농구하면 그 옆에서 기다렸던 거 같아요. 저는 운동을 딱히 좋아하진 않아서 너무 길어지면 집에 가기도 하고, 먼저 가는 친구들이랑 피시방에 가기도 했어요. 초등학생 때는 산에 가기도 하고 같이 목욕탕 가기도 하고 딱지치기도 했던 거 같아요. 만화 캐릭터 그려진 딱지나 학종이 이런 걸로 놀았어요. 중학생 때부터는 학원에 다녀서 피시방 갔다가 학원 갔다가 반복이었던 거 같아요.
광안중 학생들은 오르막 등굣길을 따라 헐레벌떡 정문에 도착하면 두발 단속이라는 고비를 한 차례 더 넘겨야 했다. 2mm를 넘기면 안 된다는데...
어릴 때만큼 경사가 심해 보이진 않더라고요. 그땐 키도 작고, 다리도 짧아서 더 힘들었던 거 같아요. 책가방도 항상 무거웠고요. 그땐 학교에 두발규정이 있었고 선생님은 규정대로 잡는 거라고 하시니까 크게 반항심도 없었던 거 같아요. 정문 옆 이발소에서 자르면 투박하긴 한데 동네 미용실보다 저렴해서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기도 했어요.
수원 님이 광안리 바닷가가 근처에 있다는 걸 고3 때쯤 알게 되었다고 했다. 수영구 살면 다들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것도 편견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바닷가에 자주 가진 않고, 민락동에서 회를 자주 먹었어요. 항상 부모님이나 이모네 차를 타고 민락동에 도착해서 회 먹고 집에 오니까 민락동 옆이 광안리해수욕장인 것도 어릴 땐 몰랐던 거 같아요. 광안리 바닷가는 광안동으로 이사 오면서 알바도 하고 엄청나게 자주 갔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여행객도 많고 해서 생각보다 자주 나가진 않더라고요.
수원 님은 삶터로서의 이곳 수영구를 어떻게 생각할까?
익숙한 동네라 그런지 조건만 맞으면 수영구에 살고 싶어요. 수영구에 애정이 있기도 하지만 교통편이 좋아서 백화점이나 영화관 여기저기 금방 다녀올 수 있더라고요. 살아보고 싶은 곳은 없는데 노년을 보낼 곳을 선택해야 한다면 부산이나 서울을 생각할 거 같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이 가까운 곳으로... 삶터로 수영구를 선택해야 한다면, 사실 관광지가 유명하기 때문에 바닷가랑 조금은 떨어진 곳이 좋다고 생각해요. 광안리에서 행사할 땐 교통통제도 하고 대중교통 이용하기도 불편하거든요. 그래도 내가 사는 곳에 관광지가 있다는 건 가장 큰 매력인 거 같아요. 촬영가는 길에 해운대에 거주하시는 택시 기사님과 얘기를 나눴는데, 해운대는 상가랑 바다가 떨어져 있고 광안리는 상가 바로 앞이 해수욕장이라서 '밤 풍경'이 다르다고 하시더라고요. 광안대교까지 있어서 확실히 활기찬 느낌의 광안리해수욕장이 매력적인 거 같아요.
그 시절 수영구 망미1동에 살았던, 이제 청년이 된 그 어린이에게 추억이 깃든 장소와 예스러운 망미동 골목을 안내받았다. 수원 님도 감회가 새로웠겠지만, 나 역시 수영구의 다른 얼굴을 토박이의 추억속 이야기와 함께 만나게 되어 수영구가 더 특별한 장소로 각인될 것 같다.
(여러분, 수영구 살기 좋은 곳 맞는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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