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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스머프'들의 처절한 사랑

미디토리 스토리/언론이 본 미디토리

by 미디토리 2013. 6. 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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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종이배를 접는 시간>,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종이배를 접던' 시간이 아니라 '종이배를 접는' 시간이란다. 꿈쩍도 않는 한진 자본과의 싸움이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행여 말이 씨가 될까 꼭꼭 눌러뒀는데 온 세상에 까발려진 기분이랄까.

한진중공업 3년의 기록. 3년간 '스머프'(푸른 작업복을 입은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의 애칭은 스머프다)들은, 희망버스 승객들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궁금해 책을 집어 들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우리는 지금의 모습으로 서로의 옆에 서 있는지 꿈을 꾼 것만 같은 희망버스의 기억들을 되짚고 싶었다.

들뜬 마음으로 집어든 책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덮어버렸다. 책을 쓰는 이들이 고민을 많이 했겠지만, 너무하다 싶다. 

'강서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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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24일 '민주노조 탄압 분쇄, 158억 소내가압류 철회, 정리해고와 강제 무기한 휴업이 부른 사회적 살인,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 전국노동자장' 현장. 영정 속의 인물이 고 최강서씨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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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쑥불쑥 솟아나는 당신. 강서햄(한진 조합원들을 부르는 이름은 주로 '형님'의 부산식 줄임말인 '햄'이다)의 이름을 이렇게 마주하는 건 여전히 사무친다. '왜 내가 강서의 유서를 읽어야 합니까'라며 절규하던 조합원의 목소리가 새삼 겹친다. 어쩌자고 이 책을 이렇게 시작했을까. 차라리 무미건조하게 투쟁 자료집을 만들어서 냈더라면, 희망버스를 기억하는 이들과 담담히 읽어내려갈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불편하다. 책에 쓰인 대로, 한진중공업 투쟁의 기록은 김진숙 지도위원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장면, 거기에서 끝났어야 했다. 조금 더 기다려서 1년 뒤 해고자들이 복직하는 장면에서 끝났어야 했다. 희망버스가 만든 말 그대로의 '기적'과 최강서가 열사가 된 지금의 현실이 모두 담겨 있는 3년. 이 시간들이 혼란스럽다.

'바로 그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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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1년 7월 9일 오후 부산 중구 부산역광장에서 '희망과 연대의 콘서트'를 마친 희망버스 참가자들. '사람은 꽃이다 우리는 꽃이다 노동자는 꽃이다'라고 적힌 대형현수막을 펼치고 영도조선소 앞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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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인터넷 검색에도 한 줄 나오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던 조합원들 곁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바로 그날' 살이 쩍쩍 들러붙는 난간을 잡고 서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독백은 그이가 크레인에서 본 노란 하늘을 내 눈앞에 펼쳐놓는다.

'빨리 옷 입어. 올라가삐다'.

'기가 막혔다'는 표현보다 이 상황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말이 있을까. 크레인으로 달려가 조정실 문을 잡아당기는 조합원들, '내려오이소'를 목이 터져라 부르는 조합원들, 산소절단기를 들고 정신없이 뛰는 조합원, 꺼이꺼이 우는 작업복의 사내들. '한진 조합원들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 자신을 칭하는 쉰둘의 누이. 그리고 그 목소리를 35미터 밖에서 듣는 조합원들.

많은 이들이 답을 찾고자 했던 질문 중 하나가 바로 '한진은 대체 뭐가 달랐기에 기존의 정리해고투쟁 그리고 연대와 다른 형태를 보였을까'였다.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들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살아서 내려오는 것'이 우선이었던 조합원들과 '조합원들을 소박한 일상으로 돌려놓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김진숙 지도위원의 서로를 향한 애틋함. 책에서 그리고 있는 1월 6일은 그 열쇠를 짐작하게 한다. 

책은 이제는 너무 뻔하게 드러난 해고의 부당성을 조합원들의 입을 통해 다시 담는다. 25년간 일한 김인수의 기술 점수가 기본 점수에 1점 더해진 11점이었고, 시운전 조장인 허석현도 기술점수가 0점에 가까웠다. 이들이 왜 해고됐는지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여전히, 단 하나도 없다. 20~30년씩 같은 일을 해온 숙련 노동자들에게 '기술이 낮으니 해고 대상이다'고 통보했는데 다시 봐도 말이 되질 않는다.

흔들려도 흔들릴 수 없었던 조합원들 앞에 '희망버스'라는 이상한 사건이 발생한다. 희망버스가 온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벽을 뚫으려다 사다리 조, 바람 잡는 조, 용역 눈길 끄는 조를 짜서 숨죽이고 담벼락에 딱 붙어 있었을 조합원들의 모습과 '한 아홉 대, 열대 오는 갑다' 하고 기다렸다는 정태훈이 1000여 명의 참가자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사실 영도 들어가는 길이 막혔다는 이야기를 희망버스 차 안에서 듣고는 '공장 앞에서 집회하고, 밤새 졸다 오겠구나' 짐작했었다. 멀찌감치 내려서 행진으로 공장 앞에 다다른 희망버스 참가자들에 "야간·불법 행진"이라며 "해산하라"는 경찰의 방송 뒤에 "희망버스 참가자들 담 쪽 인도로 올라서세요"라는 기획단의 안내는 묘한 반발심마저 갖게 했다. 

공장 안에서는 조합원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집회 사회자가 "희망버스가 도착했습니다, 환영의 함성을 지릅시다"라고 했고, 쏟아지는 함성 다음으로 "조합원 동지 여러분, 우리가 준비한 환영의 선물을 보여줍시다"라고 했다. 모두 닫힌 문과 높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공장 안의 조합원들에게 기대한 건 '풍선'이나 '불꽃놀이' 정도였다. 그 순간에 사다리가 담벼락 위에서 내려올 줄이야. 이날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조합원들의 마음에 차고 넘친 희열과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라는 벅참이 한진중공업 싸움의 또 하나의 동력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한다.

여전히 싸우고 있는 스머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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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1년 11월 1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차해도 지회장 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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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희망버스는 네 번 더 움직였다. 한 번은 서울로, 세 번은 다시 영도로. 

최루액이 난사된 봉래사거리에는 무지개깃발이 세워졌고 '한진중 프리덤'이 울려 퍼졌다. 조남호 회장은 국회청문회에 불려 나갔고 누군가 써준 대로 '지루할 정도로 느리고 다소 어눌하게, 호소하는 어투로' 김주익과 곽재규를 모른다고 응답했다. 희망버스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이들이 생겼고 이소선 어머니(전태일의 어머니)는 영정 속 모습으로 크레인을 찾았다. 크레인 위에도 한가위 보름달이 떴고 전기는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크레인 위에서 내려온 부재자투표 봉투와 공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철창에 매달려 투표한 해고자들의 표가 합쳐져 노동조합 지도부 선거가 치러졌다. 천만다행으로 정리해고투쟁위원회의 공동대표가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에 당선됐다. 하루하루 넘어가던 숫자판이 '309일'을 가리키던 날, 김진숙 지도위원은 약속한 대로 두 발로 걸어 내려왔고, 조합원들은 다시 울었다.

사측이 복직을 약속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조합원들은 힘 빠지지 않고 잘 버텼고 복직도 해냈다. 사측은 복직을 빌미로 해고자들을 회유하는 동시에 금속노조 지회를 압박해 조합원들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지리한 싸움의 연속.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고, 의리있고 자존심있는 노동자 최강서는 열사가 됐다. 그리고 2013년 6월 현재 200여 명 남짓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조합원들은 공장 안팎에서 사측의 회유와 압박에 시달리고 있고, 700여 명의 사측노조 조합원들은 휴업을 빌미로 사측에 저당 잡혀있다.

한진중공업 투쟁을 기록한 매체는 이 책이 아니어도 많다. 이 책의 가치는 그간 다뤄지지 않은 이면을 조합원들과 희망버스 승객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한계는 더 많은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단언컨대, 한진중공업 투쟁은 오롯이 푸른 옷의 스머프들 몫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SNS를 통해 많은 말과 마음이 있었지만 '연대 온 이들'이 가고 난 빈자리를 메우는 건 늘 스머프들의 몫이었다. 훈수를 두는 '한가닥 하던 동지'부터 철없이 시비 거는 '연대 동지'를 감당하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버텨내는 것은 온전하게 조합원들의 몫이었다.

스머프들의 얼굴, 하나하나 담겼어야 했다

한진중공업 투쟁의 기록이기에, 투쟁한 그들이 더 드러나야 했다. 인터뷰 대상이 된 몇몇뿐 아니라 정투위 사무실과 천막에 언제고 가면 앉아있던 그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담겼어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추억'일 한진중공업 투쟁의 한복판에 스머프들이 덩그러니 서 있다. 사측에서 휴업을 시키는 바람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가며 사측의 탄압 속에서 민주노조를 지키고 서 있다. 최강서의 영정 사진을 가슴에 품고. 

최강서는 연대온 이들에게 습관처럼 "오지마이소, 빚지는 것도 싫고 이거 다 갚을 자신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스머프들에게 준 것보다 돌려받은 것이 많은, 빚진 희망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미완의 르포르타주. 한진중공업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작업복을 입고 선 그들이 종이배가 아니라 진짜 배를 만들게 하고파 시작한 처절한 '사랑'도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소원해진 사랑을 각인시키듯 희망버스와 스머프들을 떠올리게 한다. 뜨거웠던 지난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다시 옆에 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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