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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말하다 - 예쁘다 임소영

미디토리 스토리

by 미디토리 2012. 11. 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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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나는 한 살 차이다. 그녀와 처음 말을 나눈건 작년 봄이었다. 인디야피크닉 작업을 할 때 그녀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선뜻 "좋아요"라고 말하더니 무거운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나타나 자연스레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어찌나 당당하고 여유로운지.(그것이 오랜 연습의 결과란 것을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지만) 걸음을 떼고 피사체를 관찰하고 셔터를 누르는 일련의 과정들이 물 흐르듯 움직였다. 사실 나는 예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다. 아지트 그 경계 어디쯤이었나. 나는 멀리서 그녀를 보았고, 그녀도 나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안문화행동 재미난복수 스텝활동 하는 것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도 그 언저리를 맴도는 나를 쉽게 알아챘다. 한 달 전, 임소영의 존재는 내게 더 크게 다가왔고 그것은 그녀의 미디토리 입사와 함께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를 마주하고 질문을 던진다.  

 


요며칠 그녀가 아팠다. 마음에 잘 맞지 않으면 몸부터 반응한다는 그녀의 습성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됐다. 혹여 미디토리에 적응하는데 힘이 드는 걸까? 사람들이 촌시러워서 실망한 걸까?

학교 졸업하고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두고 바로 들어오느라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어요. 나를 돌볼 시간도 없었고요. 감기몸살에다 턱관절도 많이 안좋아져서 요즘 병원갈 일이 많네요. 그래서 얼마 안되는 첫 월급을 병원비로 다 썼어요.

대화의 내용은 병원비-월급-학자금 대출-생활비-아 못살겠다! 로 이어졌고 우리의 한숨은 짙어졌다. 그때 침울해진 분위기를 깨운 그녀의 한마디, "재복으로 갑시다." 그녀를 알기 위해선 대학시절 활동했던 문화단체 '재미난 복수 혹은 아지트'의 시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재복에서 그냥 놀았어요. 놀면서 새로운 세상을 봤죠. 고등학교 2학년 말에 대학진학을 결심했어요. 그전까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하며 살 줄 았았는데, 가족들도 대학가기를 바랬고... 미술공부를 했죠. 나름 최선을 다해서 들어간 대학은 내가 생각한 '대학'이 아니었어요. 1년 만에 기대가 무너졌죠. 사색과 고민의 대학이라기 보다는... 알잖아요?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재미난복수 모임을 갔는데 그 때 처음 본 성효오빠(류성효 재미난복수 대표)가 내가 싫다고 했어요. 지금도 관계는 서툰 편인데 그 전에는 더 심했거든요. 사람에게 말을 걸 줄 몰랐어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는 나를 보고 "쟤 뭐냐?"라고 했죠. 이전까지 삶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충고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성효오빠에게도 내가 충격이었겠지만, 나에게 그 만남은 자극이 되었어요. 그렇게 학교 밖에서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의 태도를 보고 많은 걸 느끼게 됐어요.

아지트 공간을 꾸리고 전시를 준비하며 '누군가를 바쳐주는 일이 나한테 맞는 일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행사 뒷바라지 하고 코디네이터 역할도 하고. 그 때도 한계는 있었죠. 시도하거나 스스로 바꾸려고 하지 못했죠. 잘못된 건 잘 봐요. 그런데 한 번도 대안을 제시한 적이 없었지. 그게 어렵더라고요, 그런 지적은 다시 비난으로 돌아오고...

제가 미디토리를 선택한 건 어쩌면 재미난 복수 시절의 아쉬움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그때 내가 스스로 뭔가를 해보지 못했다는, 그런 마음이요. 이건 이래서 안돼, 저건 저래서 안돼, 평가만 했지. 주도적으로 나서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어느덧 그녀가 미디토리 식구가 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고 매축지마을 어르신들과 사진수업도 잘 끝마쳤다. 사진수업 수료식에서 본 그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예쁜 손녀딸로, 믿음직한 선생님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계속 밝았으면 좋겠고, 또 사진도 많이 찍었으면 좋겠다. 주변을 이내 임소영만의 색깔로 물들여버리는 그런 기분 좋은 전염성. 가습기가 퐁퐁 나오고 두툼한 방석이 깔려 있는 그녀의 자리에 나는 자주자주 놀러가고 싶다. "예쁘다 임소영!"


글 | 그랜드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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